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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머리를 가득히/독후감_요약본

육일약국 갑시다

by wandol 2016. 6. 19.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모든 경쟁력은 본질적으로 노력에서 산출된다. 니즈를 파악하려는 노력, 작은 포인트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그리고 당장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노력. 



집을 직접 찾아준 사람의 가족이나 전화를 쓴 사람들은 단골손님이 되어주었다. 영세약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객관적 경쟁력이 없으면 이처럼 주관적 경쟁력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손님이 기대하는 것보다 1.5배 이상 친절하라고 필자는 강조한다.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정도의 친절, 즉 경쟁업체가 베푸는 친절과 같은 양으로는 절대로 상대를 감동시킬 수 없다. 고객은 기대치에 못 미치거나 기대와 비슷할 때는 절대로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생각지 못한, 기대치보다 확연히 다른 서비스가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고객은 감동하게 된다. 친절이 1.2배면 상대방이 어느 정도 느끼게 되고, 1.5배를 넘기면 고객은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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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약국 갑시다

김성오 지음

21세기북스 / 20077/12,000

 

▣ 저자 김성오

1958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그는 서울대 약대를 나와 10여 년 동안 마산에서 약국을 경영했다. 영남산업 대표이사를 거쳐, 2000년 창립된 메가스터디의 부사장을 역임했다. 2003년 엠베스트 교육으로 독립했으며, 2006 11월 메가스터디와 합병한 후, 현재 메가스터디 중등부 엠베스트 대표를 맡고 있다. 섬김의 비즈니스로 매출 200배 성장을 기록한 그의 궁극적 목표는 나누고 베푸는 삶이다. 저자의 뜻에 따라, 책 판매로 인한 인세전액은 불우청소년을 돕기 위한 기금으로 사용된다.

 

Short Summary

약국하면 대개 대형 약국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김성오라는 의지의 사나이는 고향인 경남 마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4.5평의 약국을 마산의 랜드마크로 만들어낸다. 그것도 6백만 원의 빚으로 약국을 시작해 이후 시가총액 1조원 기업체의 공동 CEO가 된다. 과연 그는 누구이기에, 그리고 어떤 비결이 있기에 도깨비 같은 변신을 할 수 있었을까.

 

4.5평의 약국을 랜드마크로 만들기 위해, 그는 3년 동안 택시만 타면 육일약국 갑시다를 외쳤다. 택시를 타면서 외친 육일약국 갑시다라는 말로 랜드마크를 만들고, 동전을 약국에 준비해 놓는 등 택시기사에 대한 배려로 입소문을 냈다. 한 번 온 손님을 다시 또 올 수밖에 없게 정성을 다하는 그의 노력과 흔하지 않던 자동문을 달고 형광등을 10배로 밝히는 등 남들이 채택하지 않던 홍보를 먼저 실천하며 변화하려던 노력은 자연스레 매출의 확장과 고객의 증가로 선순환 되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기업형 약국을 마산역 앞에 오픈하게 만든다.

 

그는 쉽게 눈에 보이는 이익을 좇기보다 다소 느리지만 정성이 하나하나 쌓여 훗날 되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택한다. 시류에 편승한 작은 이익보다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나눔을 통해 기분이 좋아지고, 나눔을 받는 사람들은 마음이 행복해지고, 작은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살피는 배려가 돋보여 사람들이 발길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교방동의 작은 육일약국에서 마산역 앞의 육일약국으로, 작은 제조업 회사인 영남산업을 튼튼한 기업으로 성장시킨 그의 노력, 직원 한 명으로 시작한 중등부 인터넷회사 엠베스트를 6년 만에 27만 명의 회원이 이용하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교육사업의 성공신화까지, 성공의 길로 탄탄하게 걸어가는 그의 마음속에 담긴 경영 철학은 정직감동이다.

 

직원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멋진 CEO, 장군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방과 유비처럼, 누군가를 힘이 나게 해 주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힘을 주었기에 성공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따뜻한 나눔이 멋진 그의 이야기는 책으로도 이어지고, 책을 통해 자신의 회사와 자신의 브랜드 가치는 다시 상승하게 된다. 행복한 선순환의 연속, 그의 멋진 나눔이 지속되어 많은 아이들이 나은 혜택을 받았으면 좋겠다.

 

▣ 차례

프롤로그 : 섬김의 비즈니스

 

CHAPTER 1 고객을 영업부장으로 만들어라

육일약국 갑시다

정성이 대단한 사람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 고정관념

약사님은, 한방 공부 중

물건을 팔기보다 정성을 파는 마음으로

분수에 맞게, 힘닿는 만큼

가장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경쟁력, 마음경영

 

CHAPTER 2 고객에 앞서 직원부터 감동시켜라

장사란, 이익보다 사람을 남기는 것

직장인 마인드, 자영업자 마인드

시간이 흐를수록 빛나는 신념, 정직

적군도 아군으로 만드는 비법

실패, 그것은 경험이자 노하우

 

CHAPTER 3 이윤보다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하라

위기, 그것은 성공의 열쇠를 만드는 시간

자금의 선순환, 직원의 선순환

역전도 가능케 하는 기회, 경쟁

약국 (경영)합니다

불가능이란, 노력하지 않은 자의 변명

 

CHAPTER 4 나누고 베풀어라, 아버지의 유산

아버지의 생활신조

내게 복을 주러 온 사람들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믿음

한 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엠베스트

 

김유경 본부장 추천사 : 내가 바라본 김성오 대표


육일약국 갑시다

김성오 지음

21세기북스 / 20077/12,000

 

 

1장 고객을 영업부장으로 만들어라

 

육일약국 갑시다

경상남도 마산의 한 변두리에 있는 4.5평 규모의 이름 없는 약국. 주변에 변변한 건물마저 없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약국 육일약국으로 가자고 필자는 택시를 탈 때마다 주문을 했다. 1 6개월간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주변에 아는 모든 사람을 총동원해 육일약국을 택시 포인트로 알려나가는 데 주력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3년 만에 창원하고도 마산에서 가장 먼 상남동에서 택시를 타고 육일약국 가자고 하자 기사는 마산, 창원에서 택시 기사 한 달하고 육일약국 모르면 간첩이라 안 합니꺼라고 답했다. 대한민국의 가장 작은 약국을 서울 보령약국 다음으로 큰 약사 13명의 기업형 약국으로 키운 육일약국의 랜드마크는 이렇게 시작됐다.

 

정성이 대단한 사람

1983년 필자가 처음 개업할 당시 대부분의 약국은 1 365일 문을 열었다. 기독교인인 필자는 평일인 육일 동안은 손님에게 충성하고 일요일은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6일만 영업한다는 뜻으로 육일약국이라고 이름지었다. 필자의 사생활로 손님들에게 불편을 주는 게 싫었고 일요일에 약국을 찾는 사람들의 헛걸음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비록 경쟁 업소에 비해 영업일은 하루 적었지만 정직과 친절이라는 서비스로 경쟁 약국들보다 훨씬 많은 손님을 끌었고 더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개업 당시 하루 평균 손님은 20~30명 안팎이었다. 그때는 약사의 임의 조제가 가능한 시절이었다. 약국마다 조제 차트가 있었고 손님이 돌아간 다음 차트를 들여다보며 40~50번씩 손님의 이름을 외웠다. 손님이 너무 없어서 단골을 만들기 위해 필자는 약국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노력했고 손님이 다시 오면 조제 차트를 꺼내와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다. 이름을 불러주면 손님들의 반응은 대단해서 바로 약국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흔히 말하는 고객 감동을 변두리 영세 약국에서 정성과 노력으로 실천한 셈이다.

 

또 단골손님의 딸 이름을 바꾸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개명 절차는 무척 까다로워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내었다. 단골 고객의 딸은 은정이란 본명이 있음에도 할머니께서 천한 이름을 지어줘야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맹순이란 이름을 호적에 올린 것이었다. 그 딸은 대학교에 합격했는데 이름 때문에 등록을 포기하겠다는 하소연을 필자에게 해왔다. 그래서 변호사를 하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개명 신청에 필요한 서류 및 절차를 알아봐 주었다. 수익과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고객 만족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작은 정성으로 고객을 만족시키니 고객들은 꾸준히 약국을 찾아주는 방식으로 보답했다. 물건을 팔기보다는 신뢰를 쌓는 데 집중한 결과다.

 

손님들의 이름을 외우다보면 자연스럽게 동네 대소사에 관심이 많아진다. 그러다보니 동네 지리에 밝았다. 길을 묻는 사람이 약국을 찾아오면 최대한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조제 차트를 찾아와 전화를 걸어주었다. 부재중이거나 전화를 안 받으면 지체 없이 약사가운을 벗고 집을 직접 찾아주러 약국을 나섰다. 내 집에 온 사람에게 기쁨을이 필자의 경영철학이었기에 비록 약을 사러 온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성을 다했다. 공중전화도 많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약국전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무료로 내주었다. 집을 직접 찾아준 사람의 가족이나 전화를 쓴 사람들은 단골손님이 되어주었다. 영세약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객관적 경쟁력이 없으면 이처럼 주관적 경쟁력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하루 종일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면서 약사를 어려워하는 손님의 마음을 열기 위해 상담용 테이블을 바꿨다. 항상 서 있는 상태에서 대화해야 하는 높은 테이블을 낮은 책상으로 교체해 누구나 편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 의자도 약사용 좌석과 손님용 좌석을 똑같은 것으로 바꾸었다. 손님위에 있는 권위적인 약사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사람으로 대화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상담용 테이블을 바꿨다고 해서 하루에 10명 오던 손님이 100명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손님이 없을 때는 약국 직원을 손님 좌석에 앉혀 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님이 끊이지 않는 약국이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특히 약사와 환자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같은 눈높이, 같은 의자에 앉아서 상담을 하는 것이 환자들에게는 고객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약국의 신뢰도가 높아지니 자연스럽게 매출도 증가했다.

 

손님이 기대하는 것보다 1.5배 이상 친절하라고 필자는 강조한다.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정도의 친절, 즉 경쟁업체가 베푸는 친절과 같은 양으로는 절대로 상대를 감동시킬 수 없다. 고객은 기대치에 못 미치거나 기대와 비슷할 때는 절대로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생각지 못한, 기대치보다 확연히 다른 서비스가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고객은 감동하게 된다. 친절이 1.2배면 상대방이 어느 정도 느끼게 되고, 1.5배를 넘기면 고객은 감동한다.

 

분수에 맞게, 힘닿는 만큼

1983 7월 스물여섯에 군대를 제대한 필자에겐 서울대 약대 졸업장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일푼이었다.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와 월2부 이자를 주고 6백만 원의 빚을 내었다. 그 돈으로 약국 자리는 물론 약품까지 준비해야 했다. 시내 번화가는 꿈도 못 꾸고 몇 날 며칠 자전거를 끌고 형편에 맞는 자리를 찾아 다녔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구멍가게보다 좁은 교방동 4.5평짜리 자리였다. 당시 약국은 4.5평 이상의 규모를 갖춰야 허가가 났으므로 최소 규정을 지킨 것이다. 보증금 넣을 형편이 안돼 월세 80만 원에 2백만 원으로 약장을 짜고 3백만 원으로 약을 채워 넣고 나머지 1백만 원은 비상금으로 남겨두었다. 3백만 원으로는 약장의 절반도 못채워 의약품 도매상과 제약회사의 도움으로 빈 약통을 얻어 나머지 공간을 채웠다. 가뜩이나 볼품없는 영세 약국에 약장까지 비어 있으면 손님이 올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국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6백만 원의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빈 약통을 진짜 약통으로 바꿔 채우는 데는 꼬박 1 6개월이 걸렸다.

 

약국 개업 1년 후 더 이상 빚쟁이는 아니지만 딱히 재산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자산 제로 상태였다. 그러나 홀가분하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매달 십만 원씩의 장학금을 주기로 결심했다. 형편이 넉넉할 때 더 큰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가진 것이 없을 때 나누는 습관을 들이면 큰돈이 생겨도 욕심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수에 맞게 힘닿는 만큼만 하겠다는 거듭된 부탁 끝에 교방초등학교 학생들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교방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매달 보낸 장학금을 1년 치 모아놓고 졸업식 당일 직접 전달하라는 연락을 했다. 졸업식장은 ! 육일약국 아저씨다는 환호성으로 떠나갔고 몸 둘 바를 모르며 정신없이 장학금을 전달하고 큰 기쁨을 맛보았다. 사람들은 항상 나눈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돌려주었다.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 고정관념

손님 없는 작디작은 약국은 어둠이 내리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어두워서 눈에 안 띈다면 밝게 만들어야 했다. 당시 약국은 40와트 형광등 6개면 충분했다. 그런데 일부러 25개의 형광등을 설치하라고 주문했다. 약사님요. 이 콧구멍만한 약국에 뭐 볼게 있다고 이리 많은 전구를 설치하시는교? 여기 25개가 다 들어갈 수나 있을까 모르겠슴더. 전기세 억수로 나올 텐데예. 형광등 설치 기사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25개의 형광등이 그 좁은 천장에 간신히 들어섰지만 그날 저녁 약국은 눈이 부셨다. 형광등 설치 한 달 후, 전기세가 전달보다 무려 20만 원이나 더 나왔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약국은 더욱 눈에 띄었고, 캄캄한 골목길에 훌륭한 가로등 역할을 해주어 손님들도 만족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 매출액이 100만 원 정도 증가했다. 20만 원 투자로 다섯 배의 이득을 본 것이다. 당시만 해도 가게 문을 닫는 동시에 간판의 불도 모두 껐으나 육일약국의 불은 밤새 켜져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불이 켜진 간판을 보고 약국을 인식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4~5년 후 일부 은행 간판들이 밤새도록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남보다 앞서 간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약국을 경영하면서 6개월 이상 똑같은 전략을 지속한 적이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형광등을 단 후에는 약국을 조금이라도 커 보이게 하려고 벽을 터서 유리문을 달았다. 약국 공간을 넓히기 위해 약국 내의 숙식 공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공사에 대해 사람들의 반대도 심했고 약국 공간도 별로 늘어나지 않았지만 현 상태를 유지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점점 늘어나는 손님을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건물주와 건물 전체를 3층으로 신축하기로 협의했다. 육일약국 면적이 10년 동안 3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혁신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고정관념이다.

 

1986년 마산 롯데 크리스털 호텔을 찾았다.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호텔에 들어서는 데 현관에 설치된 자동문이 눈에 띄었다. 자동문을 바라보니 어르신이나 짐이 많은 손님들에게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번호부와 114안내까지 총동원해 자동문 설치 업체를 알아냈다. 설치비용은 200만 원으로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앞서가는 약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아마도 크리스털 호텔에 이어 마산에서 두 번째로 설치되는 자동문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자동문은 동네의 명물이 되었다. 매일 아이들이 자동문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삼삼오오 몰려들어 열려라 참깨를 목청껏 외쳐댔다. 가끔 지나친 장난을 친 아이들도 있었지만 황희 정승의 일화를 떠올렸다. 결국 자동문은 두고두고 육일약국에 엄청난 홍보효과를 가져다주었다.

 

1980년대만 해도 동네에서 경제 신문을 보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변두리 조그만 약국을 경영하더라도 경제의 흐름을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경제 신문을 신청했다. 구독자가 너무 적어 신문은 하루 뒤에 배달되었지만 유통 업체의 대명사라 불리는 월마트 기사를 보게 되었다. 마이카 시대를 맞이하여 시내가 아닌 도시 외곽에 창고형 마트를 지어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필자도 번화가에서 큰 약국을 경영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월마트 기사를 보는 순간 굳이 시내가 아니라 외곽에 있는 대형약국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마산역 앞에 5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는 약사 선배와 동업할 기회가 생겼다. 지금의 마산역이야 우수 상권에 속하지만, 1994년 마산역은 열차 이용객도 그리 많지 않은 한산한 역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마산역 앞에 약국을 내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역 앞에 대형 약국을 오픈하면 본전도 못 건질 것이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대한민국도 마이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자동차 시대가 열릴 경우 마산역은 더없이 좋은 교통의 요지였다. 한적한 기차역을 공영주차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시장조사 결과, 최악의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최저 생존은 가능하다는 확신을 내렸다.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기 전 간판부터 주문해 설치했다. 오픈 한 달 전부터 조명을 최대한 밝게 설치하고 날이 저물면 간판에 밤새도록 불을 켜 약국 오픈을 알렸다. 오픈 당일 한적한 마산역 주차장에 손님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마산은 물론 창원, 거제, 함안, 진해, 고성 등에서도 자동차를 타고 약을 사러왔다. 대성공이었다. 육일 약국을 경영한 지 꼭 11년만이었다.

 

개업식 날 비싼 선물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지인들에게 다른 선물은 일체 받지 않으니 만 원짜리 화환 하나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오픈 당일 아침에 화환이 도착하기 시작해 1백여 개의 화환이 줄지어 늘어섰다. 무관심하게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마어마한 양의 화환을 보고 약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업 선물로는 고급 타월을 준비했다. 드링크제나 소화제같이 저렴한 약을 사도 타월을 나누어주었다. 표면적으론 손해보는 장사였지만 구매 가격에 상관없이 한 명 한 명에게 마음을 담아 90도로 절하며 개업 선물을 전했다. 오전에 방문한 사람이 몇 시간 후에 다시 오고 온 가족이 연달아 약국을 방문했지만 처음 온 사람과 똑같이 대했다. 전단지라도 만들어 약국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데, 입소문을 내주니 하루에 몇 번을 찾아와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후 마산역 육일약국 13명의 약사를 둔 기업형 약국이 되었다. 약사 숫자로 보면 19명의 약사가 있다는 종로의 보령약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으며, 진해, 창원, 거제 등에서 오는 고객이 몇 십만 명은 족히 되었다. 의료보험의 확대와 약사와 의사의 과잉 배출로 동종업계가 사양길로 접어들던 환경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성장이었다.

 

가장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경쟁력, 마음경영

고객을 다시 찾게 만들려면, 먼저 고객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욕구를 정확히 탐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성격, 마음, 경제적 능력, 교육 수준, 인간성, 인격 등을 관심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고객의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면, 눈높이식의 맞춤 상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주는 가게와 많은 손님 중의 하나일 뿐인 가게…. 어느 곳을 찾을 지는 자명한 일이다. 약품을 예로 들면 가격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제조회사 즉 메이커나 약품의 성분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메이커를 먼저 생각하는 손님에게 무조건 저렴한 약을 내놓으면 거래도 성사되지 않을뿐더러 언짢아지게 마련이다.

 

영원한 단골은 없다. 상품은 하자가 있을 경우 교환해주면 되지만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돌아선 고객은 다시 붙잡을 수 없다. 새로운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기존 고객을 만족시키는 게 훨씬 수월하다. 서비스는 또 하나의 상품이다. 상품에도 품질이 있듯이 서비스 역시 차이가 있다. 손님의 숫자도 빈익빈 부익부다. 하루에 한 명씩 늘어가기만 해도 어느 순간 손님이 엄청나게 증가하지만, 반대로 줄어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계속 빈貧할 것인지, 부富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나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요즘 감동경영이란 말을 많이 한다. 감동경영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손님을 향한 마음에 혼을 담을 때만 가능하다. 모든 곳에 내 마음을 녹여 넣고, 상대방의 마음이 내게로 움직이게 하는 것, 필자는 이를 마음경영이라 부른다. 돈만 추구하면 돈과 사람을 모두 잃지만, 마음을 잡으면 사람은 물론, 그 외의 모든 것이 따라온다.

 

Give & Take

사업의 성공은 사람의 마음 방향에 달려있다. 사람의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는지, 반대로 나를 떠나고 있는지에 사업의 성패가 달린 것이다. 감동을 주는 요소의 핵심은 바로 주는 것이다. 주는 것이 꼭 금전이거나 물질일 필요는 없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정성과 시간, 노력을 주면 된다.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겐 하다못해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었다. 육일약국에서 2백 미터 떨어진 곳에 양로원이 하나 있었다. 자식에게 버림받은 분들, 자식이 있어도 갈 곳이 없는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병원이나 약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 분들이 꼬깃꼬깃 모아둔 용돈을 들고 약국을 찾으셨다. 약을 먹어서 나을 병이 아니었기에 그분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당신들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여기저기 아픈 곳을 물어보며 자식들이 해야 할 위로를 대신 해주면 굳이 약을 쓰지 않아도 상태가 호전되었다. 봉사활동을 나오면 그분들에게 밀감 3개와 사탕 10개를 두고 가는데 그 중 밀감 1개와 사탕 3알을 약국에 갖다 주는 분들이 꼭 있었다. 그야말로 주고받는 정이었다. 감동을 주고받는 요소가 많은 가게나 기업은 성장한다.

 

2장 고객에 앞서 직원부터 감동시켜라

 

장사란, 이익보다 사람을 남기는 것

중등부 온라인 교육 사업을 하는 50대의 CEO! 지금의 필자를 대표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필자는 컴맹에 가깝다. 인터넷으로 사업을 하지만 단순히 문서를 작성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인터넷 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비결을 필자는 직원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약사 출신에 아날로그세대라는 핸디캡이 있는 필자를 이끌고 메가스터디 앰베스트를 최고 기업으로 키운 사람은 바로 직원들이기 때문이다. 사이트 기획부터 디자인, 프로그래밍까지 제 역할을 다 해준 직원들 덕분에 오늘날의 회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한번은 회사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과장 한 사람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당황했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라며 반려했다. 그 과장의 뜻은 완강했지만 간곡하게 만류했다. 일주일 동안 세 번에 걸쳐 사직의사를 밝혀왔고, 쉽지 않은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사람만큼 중요한 자산이 없다. 회사를 위해 오랜 시간 많은 노력을 해 왔고 앞으로 회사가 더 잘되는 기쁨을 함께 맛봐야 할 직원이었다. 다섯 번째 사직서를 마주하고 이 과장 니는 정말로 우리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다. 내 니가 지금까지 고생한 걸 왜 모르겠노. 이만큼 키워놨으믄 더 크게 자라는 것도 봐야하지 않것나.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그래이. 그리고 다음 날 그 직원은 회사에 남기로 했다. 그는 이 전보다 더 열성적으로 일했고 필자는 그에게 이직한 것보다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필자는 직원을 뽑을 때도 신중을 기하는 만큼, 사직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신경을 쓴다. 평균 3~5번의 면담을 통해 끈질긴 설득에 나선다. 이 과정을 통해 사직서를 낸 직원은 자신이 이 회사에 정말 필요한 존재라는 가치를 느끼게 된다. 사장의 신임도를 몸소 느끼고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더 많이 부여하며 전보다 1.5배 이상의 실적을 보이며 일에 매진한다. 그리고 동료직원들도 CEO가 일개 말단 사원에게까지 정성을 들이고 아끼는 것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진다. 직원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물질적인 보상도 필요하지만 그 전에 믿고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직원이 살아야 회사가 산다

CEO는 고객을 감동시키기 전에 직원을 감동시켜야 한다. 잘 되는 회사를 보면 조직원이 살아 움직이며 자발적으로 일을 만들어 낸다. 필자는 직원이 살아야 회사가 산다고 생각한다. 가화만사성이라고 직원의 가족도 회사의 한 식구이자 조직원으로, 장기적으로는 내부 고객이 될 수 있다. 한번은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를 직원 한 사람과 관람하게 되었다. 관람 후 상암구장 내 쇼핑센터를 지나게 되었다. 함께 간 직원에게 아내에게 줄 선물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한사코 사양하던 그 직원은 예쁜 티셔츠를 골라 밝은 표정으로 집에 돌아갔다. 얼마 후 사석에서 그 직원은 사장님! 제 아내가요. 엠베스트 문 닫을 때까지 다니랍니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필자는 직원의 결혼식 등 가족이 참여하는 길·흉사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노력하고 있다. 회사의 공식적인 경조사비 외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봉투를 따로 준비한다. 회사의 돈은 공금이며, 그런 기회를 통해 마음을 전하고 싶은 생각에서다. 그리고 항상 만 원짜리 신권을 준비해 두었다가 직원의 아이들을 보면 쥐어준다. 직원들은 한사코 만류하지만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을 보는 것이 또 하나의 기쁨이다. 더불어 직원이나 가족들도 작은 아이까지 일일이 신경쓰는 모습에 감사한다. 어버이날에는 인재로 키워 주셔서 감사한다는 뜻으로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직원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다. 사장님. 우리 엄마가요. 이 회사 오래오래 다니래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직원의 부모님이 회사에 대한 신뢰를 가졌다는 확신이 든다. IT업계의 이직률이 높은 편이지만 엠베스트는 4년간 동종업계로 이직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주변에 좋은 회사임을 알리고 능력 있는 직원들을 데리고 오니 헤드헌터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직장인 마인드, 자영업자 마인드

1970~1980년대 기업문화는 지시 사항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식이었다. 현재 기업은 책임이라는 채찍과 권한이라는 당근을 양손에 쥐어주며 주인의식을 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트렌드를 읽어낼 줄 아는 거시적인 안목까지 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영업자 마인드가 인정받는 시대인 것이다. 직장인은 매달 월급날을 기다리지만 자영업자는 매월 돌아오는 월급일이 무섭다. 자영업자는 직원의 급여를 주기 위해서 어떻게든 이익을 남겨야 한다. 직장인들은 달력의 빨간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자영업자는 쉬는 날이 많을수록 손해다. 관리비, 월세, 급여, 세금까지 나갈 돈이 기다리고 있다. 자영업자는 먹고 살기 위해 일을 만든다. 독한 놈 하고 손가락질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365일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낸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자영업자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회사에서도 무색무취인 사람보다 발로 뛰며 일을 만드는 사람을 인정하기 마련이다. 어제는 바꿀 수 없지만 오늘은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있다. 꿈을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발로 뛰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나는 신념, 정직

군대에서 필자는 의무대 약제병이었다. 어느 날 휴가가는 선임병이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그 의미를 몰라 쳐다보니 휴가나갈 때마다 약을 챙겨가는 게 관행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없어진 약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약제병에게 있었다. 마음속으론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그 시절 군대는 무서웠다. 하극상의 결과는 폭력으로 돌아올 게 뻔했다. 선임병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만큼 애교도 부리고 사정도 해가며 눈치껏 난처한 입장을 표명해, 가지고 나가는 약을 조금 줄일 수가 있었다. 드디어 필자가 휴가를 가게 되었고, 일부러 보라는 듯이 빈 손으로 휴가를 나갔다.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윗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지만 나부터 정직을 실천함으로써 잘못된 관행을 근절시키겠다는 의도였다. 후임 약제병에게도 틈날 때마다 강조했고 상사들에게도 약의 양이라도 줄여달라고 부탁해 갖고 나가는 약의 부피가 줄어들었다. 그들이 제대하고 난 후 약을 빼돌리는 일은 사라졌다.

 

메가스터디 엠베스트에는 네 가지 금기 사항이 있다. 첫째, 아닌 것을 맞다고 말하지 말 것, 둘째, 맞는 것을 아니라고 하지 말 것, 셋째, 작은 것을 크게 과장하여 말하지 말 것, 넷째, 큰 것을 축소하여 말하지 말 것. 한마디로 정직하라는 것이다. 정직은 은행의 예금 통장과 같다. 자신이 넣은 정직은 신용과 믿음이라는 이자를 남긴다. 오래도록 쌓은 신용은 다른 사람이 훔쳐갈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성공의 필수 요건이며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큰 밑천이 된다.

 

실패, 그것은 경험이자 노하우

2000, 메가스터디가 창립되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메가스터디는 손주은 사장이 전력을 쏟아부은 땀의 결과다. 당시 필자는 부사장으로 손사장의 조력자 입장이었다. 메가스터디가 성장가도를 달리던 2002년 말, 필자는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을 위해 독립을 결심했다.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지는 중학생들에겐 얼굴을 맞대고 하는 오프라인 강의가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가족들 역시 탄탄한 회사의 부사장이 낫지, 시장성도 없는 사업에 무모하게 뛰어든다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필자는 뜻을 함께 하는 직원과 함께 메가스터디에서 책상 두 개를 빌려 창업을 감행했다. 교방동 육일약국과 다름없는 시작이었다. 엠베스트는 창립 8개월 만에 중등부 온라인 사업 1위를 차지했고, 창업 4년 만에 20배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2006 11월 모회사인 메가스터디와 합병하여 시가총액 1조 원이 넘는 회사로 성장했다.

 

약사로 출발한 필자는 지금 제조업체를 거쳐 온라인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잘 나가는 약국을 그만두고 학원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의약분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등의 연관 관계가 없는 이력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공의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필자가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성공하는 습관을 매일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무모하다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람들이 안된다고 하는 것 50% 이상을 성공시켰다. 문제는 단 한 번에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진 덕분에 남들이 말하는 성공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두 번 실패했다고 해서 절망할 것은 없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이자 노하우다. 성공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3장 이윤보다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하라

 

성공의 열쇠를 만드는 시간, 위기

약국을 경영하던 중 청소기 제조업체인 영남산업을 인수하게 되었다. 영남산업은 LG전자에 청소기 부품과 일부 조립품을 납품하는 1차 협력업체였다. 주위에서는 약사출신이 무슨 제조업이냐는 의식이 팽배했다. 아무튼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제조업이라는 게 노력과 정성에 비해 마진율이 형편없이 낮았다. 게다가 수입에 상관없이 엄청난 금액을 들여 끊임없이 새로운 설비를 갖춰야 했다. 한마디로 이윤이 별로 남지 않는 장사였다.

 

 

청소기 부품 중에는 돈이 되는 아이템도 있고,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아이템도 있었다. 때문에 돈이 되는 아이템만 맡으려는 물밑 경쟁이 치열했다. 필자는 정공법으로 뚫고 나가기로 결심하고 직원들에게 다른 업체에서 맡지 않으려는 아이템을 맡아오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직원들 사이에서 하나 둘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약사출신이라 못 미더운데 돈 안되는 품목을 받아오라니…. 6개월을 그렇게 하자 LG전자 측에서 시선이 달라졌다. 꼭 필요한 부품인데 쉽게 맡으려는 업체가 없어서 골치 아팠는데 스스로 주문을 받아가니 그쪽에서 먼저 돈이 되는 아이템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영남산업은 청소기 사업 부문 4위에서 1위로 올라섰으며 3년 만에 4배 이상의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고 백 베이징 스테이션!(Go back Beijing station!)

영남산업의 사장으로 취임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LG전자에서 주관하는 중국, 일본 관련업체 견학프로그램에 참가하라는 공문이 왔다. 참가 인원은 총 12명이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니 항공사의 착오로 필자의 표만 예약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천진행 항공기의 전좌석이 매진이었다. 잔뜩 기대했던 첫 해외여행이 무산된 탓에 허탈하게 앉아 있다가 항공사 실수니 중국을 가는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항의했다. 항공사 직원은 1시간 후 떠나는 북경행 티켓이라도 괜찮겠냐고 물어왔고 필자는 북경도 중국이라며 흔쾌히 수락했다. 북경과 천진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중국어는 아예 할 줄 몰랐다. 다만 일행이 묵을 호텔만 일정표를 통해 알고 있었다.

 

북경 공항에 도착, 대한항공 사무실을 찾았으나 굳게 닫혀 있었다. 무작정 택시를 타고 Go 티엔진을 외쳤다. 그런데 짙은 안개 때문에 고속도로가 폐쇄되었다. 할 수 없이 기사에게 고 백 베이징 스테이션!(Go back Beijing station!)을 외쳤다. 그러나 주차장을 방불케하는 도로 정체 때문에 도로 한복판에서 내려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북경역에 도착해 천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천진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니 마침 저녁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는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협력 업체인 LG전자로부터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위기를 돌파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적절한 타이밍의 미학

약국 경영 당시 태풍 피해가 극심한 적이 있었다. 피해가 너무 커 성금을 내기로 결정하고 낮에는 약국 일 때문에 바쁘니 아침 일찍 성금을 내러 방송국에 갔다. 성금 접수 첫날이고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접수처가 준비되지 않았고, 기다렸다가 준비해간 성금 50만 원을 1등으로 접수하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 TV뉴스에 성금 접수 내역이 나왔고 약국 상호와 필자 이름이 보도되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약국으로 몰려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그 날 이후 고액 성금 기탁자만 자세히 소개되고 소액 기부자는 더 이상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타이밍의 미학을 배우게 되었다.

 

메가스터디 엠베스트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됐을 때 직원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목표 매출액에 도달하면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어느 날, 모니터 속의 매출 그래프가 직원들과 약속한 목표 매출액에 거의 도달했음을 보여주었다. 그 날 아침 직원을 시켜 신권을 찾아와 봉투에 넣었다. 몇 시간 후 매출액은 목표점을 돌파했고 5분 후 약속대로 직원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 5분이라는 시간은 혹시 있을 환불에 대비한 것이었다. 직원들은 예상치 못한 선물에 깜짝 놀라면서 입이 귀에 걸렸다. 당연히 받을 보너스였지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전달되니 기쁨이 두 배가 된 것이다.

 

 

삽십고초려(三十顧草廬)

학원사업의 성패는 좋은 강사진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년 메가스터디 부사장으로 있을 때 EBS스타 강사 한 분을 영입해야 한다고 직원들이 입을 모았다. 대상 강사는 인천에 계시는 분이었고 당시 고3 담임을 맡고 계셨다. 전화를 하자 그 분은 학생들의 수능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할 수 없다며 거절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 후 시간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15번째 통화에서 항상 예의를 갖춰 거절하시던 분이 도대체 왜 자꾸 전화하느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딱히 할 말도 없어서 그냥 한 번 해봤습니다라고 답했다. 상대방도 어이가 없었는지 웃었다. 그 후 8개월 동안 30번도 넘게 통화를 했다. 그러면서 짬짬이 인천을 찾아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물어보곤 했다. 인천까지 오가는 데 대략 5~6시간이 걸렸는데 그렇게 오가기를 일곱 번을 하고나자 마침내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해 11 6일 수능시험을 마치고 다음날 그 선생님은 메가스터디 식구가 되었다.

 

4장 나누고 베풀어라, 아버지의 유산

 

아버지의 생활신조

필자의 아버지는 마산 인근에서 순회 목회를 하시던 가난한 목회자이셨다. 정직과 자립을 기반으로 엄격한 기독교 교육을 시켰다. 거짓말을 하는 날에는 한 끼 식사를 굶어야 했으며, 일곱 살 때부터 한자가 섞인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읽어야 했다. 방학만 되면 꼭두새벽부터 깨워 골목길을 청소하라고 했다. 청소를 하다보면 내 집 앞만 쓸 수가 없어서 앞집과 옆집 골목길까지 청소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다투는 일이 있으면 아버지는 무조건 친구 편을 들었다. 이웃에서 맛있는 음식을 할 때면 절대 밖으로 못나가게 하셨다. 어쩌다 우리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할 때면 여지없이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내가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친구들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까웠다. 아버지는 내일 먹을 쌀이 없어도 손님에게는 모든 것을 내놓았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자식이 나눠주고 베푸는 자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목회자로서 아버지는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셨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고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 돈 대신 아버지는 인내심, 정직, 성실, 긍정, 판단력을 물려주신 것이다. 또 선한 방법으로 열심히 돈을 벌고, 저축하고, 쓰고, 나누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비록 빚으로 약국을 시작해야 할 만큼 필자는 경제적인 도움은 받지 못했지만 수백 억의 재산보다 더 가치 있는 유물을 물려주셨다고 생각한다.

 

내게 복을 주러 온 사람들

자만심을 버리자. 내가 명문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부터 잊어버리자. 필자가 대학교에 입학한 첫 날 쓴 일기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최고 대학에 들어갔다는 자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외 학생의 부모님들, 군대 생활 역시 명문대 출신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그러나 사업을 하다 보니 무조건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많아졌다. 필자의 아버지는 힘없고 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현재 모습만 보고 불손하게 대하는 것은 내게 오는 복을 쫓아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셨다. 실제로 사업을 하면서 이런 일을 많이 경험했다. 길을 묻는 사람을 정성껏 안내하면 얼마 안 있어 그가 고객이 되어 더 많은 손님을 몰고 오는 식이다. 수많은 사람 중에 누가 나에게 복을 주러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든 복을 주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진심으로 대하다 보면, 그를 통해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도 소개받을 수 있다. 그게 바로 복이다.

 

한 명으로 시작한 엠베스트

2003 5월 엠베스트 오픈 당일, 친구의 딸 아이 하나가 수강을 신청해왔다. 너무나 귀한 한 명의 고객이었다. 약국을 경영하면서 한 명의 고객이 수 천 명이 될 수 있음을 이미 경험했기에 몇 안되는 고객이지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했다. 3만 원의 수강료를 받던 때도 5만 원을 들여 지방까지 애프터서비스를 다녔다. 고객에게 충성하고 성심을 다하는 것보다 좋은 투자가 없다. 감동을 받은 고객들이 입소문을 내주기 때문이다. 상담직원에게 하루 몇 건보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고객이 제시하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친절하게 상담하도록 했다. 직원은 물론 고객에게 받은 신뢰는 결국 회사가 성장하는 데 탄탄한 밑거름이 돼주었다. 약국을 경영하면서 고객만족도보다 더 좋은 광고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는 온라인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객의 높은 만족도는 회원 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사랑의 입학식

텍스트 상자: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메가스터디 엠베스트에서는 해마다 사랑의 입학식이란 행사를 진행한다. 큰사람 실천 캠페인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 행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공부에 매진하기 힘든 학생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올 해는 지방자치단체 및 학교에서 50명의 예비 중학생을 추천받아, 입학에 필요한 학용품과 책가방, 교복 맞춤권을 선물했다. 형편상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이들에게, 메가스터디 엠베스트의 모든 강좌를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이 현재의 어려움이 좌절하지 않고 사회의 따뜻함을 느끼며 올바른 성인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란다. 필자의 교육 목표는 모든 학생이 전국 어디서든, 최고의 강사진으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환경이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저렴한 가격으로 누구나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그날까지 필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